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밀레트 제도 (문단 편집) == 밀레트의 이동 == 원칙적으로 밀레트 제도는 해당 구성원의 [[종교]]에 기반했기 때문에 [[모국어]]가 [[그리스어]]이든, [[튀르키예어]]이든, [[세르비아어]]나 [[아랍어]]이든 정교회 교도기만 하면 룸 밀레트에 속하고, [[콥트교]] 신자면 콥트 밀레트에 속하고, 마찬가지로 모국어가 [[튀르키예어]]든, [[아랍어]]든, [[알바니아어]]든 무슬림이면 무슬림 밀레트에 속했다. 오스만 제국 전체 역사를 볼 때, 이 밀레트간의 이동은 [[19세기]]까지만 해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. 비무슬림들이 이슬람으로 [[개종]]할 때에도 애초에 밀레트가 다르면 동족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, [[마을]]도 서로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향촌의 경우 마을단위로 개종을 했으면 했지, 개인이 다른 종교로 개종해 밀레트를 옮기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. [* 단 [[예니체리]]로 징집하기 위한 [[데브시르메]] 제도로 선출된 비(非)무슬림 아이들은 예외이다. 이들은 어린 나이에 무슬림 교육을 받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.] 개인이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해당 개인의 모든 관계, 즉 혈족, 친족, 마을 공동체를 모두 버리고 완전히 낯선 새로운 [[공동체]]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. 그리고 무슬림 밀레트에 속하는 구성원들은 애초에 이슬람 교리 상 이슬람을 버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했다. [[정교회]]의 성인인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의 일화에서도 나오지만, 일리아스 아르두니스는 [[지즈야]]를 면제받기 위해 꼼수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한 그리스인 마을 출신으로, [[무스타파]]라는 무슬림 이름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. 하지만 그가 [[아토스]]를 여행했을 때 겪은 신비적인 체험으로 그는 자신의 진정한 [[신앙]]을 찾았고, 8년만에 돌아온 [[고향]]에서 친한 튀르크인 [[군인]]이 "이보게 무스타파, 자네 어딜 그리 다녀왔나?" 라고 묻는데 "나는 무슬림 무스타파가 아니라 정교인 일리아스일세." 라고 말한 것 때문에 마을의 [[관리]]들이 그를 법정에 세우고 배교혐의로 [[처형]]시킨다. 정교회의 일대기에서는 그 후 [[기적]]이 일어나 일리아스의 시신이 썩지않고 광채를 발하는 것을 보고 놀란 무슬림인척 하던 마을사람들이 단체로 믿음을 회복하고, 일리아스의 친구인 튀르크 군인을 비롯한 일부 무슬림마저도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.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의 경우 이러하게 무슬림인 척 해서 비무슬림에 대한 [[세금]]을 면제받으려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에 시성된 경우이다. 하지만 여기도 [[사람]]사는 동네이기도 하고(...) 애초에 오스만 제국 황실은 제국의 [[권위]]와 국가 [[이데올로기]]를 강화하는데나 관심이 있었지, 사회적 통제 수단으로서 종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황실을 위협하는 [[광신도]]나 [[극단주의]] 설교자들을 조졌으면 조졌지, 이슬람을 버렸다고 조지는 경우는 정말로 해당 인물이 [[반란]]이나 [[쿠데타]]에 관련되지 않는 이상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. 당대의 오스만인들은 일종의 [[보험]]차원으로 무슬림이면서 [[성당]]에 나간다거나, 그리스도인이면서 무슬림인척 하거나 하는 등 여러개의 [[종교]]를 갖는 것도 흔했다. 또한 [[세금]] 때문에라도 [[신민]]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는데, 비(非)무슬림이 내는 세금이 무슬림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. 따라서 신민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려면 국가 재정이 큰 타격을 입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. 그 외에도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정교회 신자가 상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[[샤리아]]법 대로 행한다거나,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, 가톨릭 성직자, 유대인 [[랍비]], 이슬람 [[이맘]]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서 종교 의식을 행하는 등[* 출처:마크 마조워의 <발칸의 역사>] 매우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양상을 보여줬다. 정치적으로도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[[전성기]], 역사학자들은 흔히 '고전기'라 부르는 [[16세기]] 기준으론 주로 정교회 계열 기독교 피지배민들은 관료, 예니체리 후보생, 납세자, 상인으로서 국가에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인재들이었고, 정교회권 피지배민들도 이때만 하더라도 [[4차 십자군]]이 상징하는 [[동로마 제국]] 말기의 위기를 틈타 [[발칸 반도]] 일대까지 가톨릭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'같은 기독교인'들의 [[패권주의]]적 탐욕을 똑똑히 기억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[[국력]]을 빌려 전 시대 [[라틴 제국]] 시절 들어왔던 가톨릭 교회, 성직자들을 쫒아내며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상당히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. 반면 소위 '정통 무슬림'들이 많이 살던 [[아나톨리아]] 내륙, 동부 지방에는 여전히 (오스만 중앙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지방에 할거했던)튀르크 유목 부족들의 영향력도 강력했고, [[데브시르메]] 제도의 부상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기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쩌리가 된 이들은 당국과 사이도 안 좋아 카리스마적인 [[반정부]] 성향 [[수피]]의 선동과 함께 이웃 적성 열강 [[사파비 왕조]]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[[반란]]을 종종 일으켜 16-17세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'''이교도인 [[기독교인]]들이 훨씬 더 말도 잘듣고 국가에 공헌도 많은 반면 같은 무슬림인 튀르크, 아랍 유목민들은 하등 도움도 안되면서 말썽은 엄청 일으키는 골칫덩어리''' 취급을 받았다. 단 이러한 모습도 [[19세기]]에 이르면 변하기 시작하는데, [[민족주의]] 시대 이후 각각의 종교 공동체들이 자신의 혈통적, 언어적, 민족적 [[정체성]]을 자각해 떨어져나가거나, [[서구권]]의 [[선교]]로 인해 기존의 [[종파]]를 버리고 다른 종파로 이동하는 현상이 자주 보였다. 특히 [[가톨릭]]과 [[개신교]]의 경우, 서구 [[열강]]과의 우호관계를 원하는 정부에 의해 선교행위를 막지 말라는 [[칙령]]을 내리기도 했다. 대부분 [[아랍계 기독교인]]이나 정교도 같이 기존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선교의 대상이었으며, 일부 무슬림들도 [[가톨릭]]이나 [[개신교]]로 개종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